2004년 9월 24일 금요일

[펌] 카사노바 -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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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다. ‘생갈트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라는 이름은 그가 자칭한 것이다. 처음에는 성직자·군인·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입신하려 하였으나, 추문(醜聞)으로 투옥되었다.

1756년 탈옥한 이후부터 생애의 3분의 2를 여행으로 유럽 전토를 편력하였다. 재치와 폭넓은 교양을 구사하여 외교관·재무관·스파이 등 여러 직업을 갖기도 하고, 감옥에 투옥당하는 등 그의 삶은 변화무쌍하였다. 그 동안 여러 계층의 사람들(君侯·귀족·문학가·과학자·예술가·희극배우·귀부인·천민·사기꾼·방탕아)과 두루 사귀었고 계몽주의 사상에도 접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보헤미아 둑스의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사서(司書)로 쓸쓸히 죽었으나, 그의 저술가로서의 명성은 이 성에서 지루한 나날을 달래기 위해 쓴 《회상록 Histoire de ma vie》(12권, 1826∼1838)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 데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또한 5부로 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 Icosameron》(1888)는 쥘 베른의 《지저(地底) 여행》의 선구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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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사랑의 헌장과 맹세

미국의 저술가 로버트 그린은 <유혹의 기술>에서 카사노바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혹자”라고 말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생 동안 122명의 여인과 갖은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매번 여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카사노바 자신도 “나는 여성에게 쾌락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여성과의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카사노바가 ‘사랑의 군주’였던 것만큼이나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작가였으며 수많은 직업을 갖고 ‘사업’을 벌인 활동가였고, 무엇보다 당대의 인습과 편견을 조롱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카사노바의 스페인 기행>은 흐릿한 이미지의 카사노바 상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실체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1725~1798)는 이탈리아 베니치아에서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에 파도바 법대에 입학해 민법 및 교회법으로 학위를 받은 뒤 산시프리아노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곧 퇴학당했다. 이후 그는 유럽의 동서남북을 종횡하면서 성직자·작가·군인·첩자·외교관·바이올리니스트·프리메이슨단원으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권력자들의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으며 번번이 투옥과 추방을 겪었다.

만년에 그는 보헤미아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자신의 일생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12권 분량의 방대한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썼다. <카사노바의 스페인기행>은 이 가운데 1767~1768년의 스페인 생활을 기술한 부분을 뽑아 번역한 것이다.

그의 자서전은 경험과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솔직성’에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프랑스의 후작 마르키 드 사드(1740~1812)의 소설 작품에 비견된다. 하지만 사드가 가학적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사디즘이란 용어를 남긴 것에 비하면, 카사노바의 글은 사뭇 절제돼 있고 ‘품위’ 있다.

이를테면, 그가 탕녀 니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너무나 음탕해서 글로 옮겨 적을 수조차 없는 짓거리”라고 말하는 것이 묘사의 ‘최고치’인데, 사드라면 그 ‘짓거리’ 자체를 아주 세밀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자서전은 당대엔 너무 부담스러웠던지 원문 그대로 출간되지 못하고 윤색과 생략으로 표현의 모서리가 깎여나간 채 세상에 나왔다. 1960년대에 와서야 카사노바의 자서전은 제 모습 그대로 출판됐다.

 

<…스페인기행>은 한편의 장편 소설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이야기의 구조가 튼실하다. 귀족을 모욕한 죄로 파리에서 추방당한 주인공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마드리드에 도착하지만, 1년 남짓 만에 그곳 귀족의 미움을 받아 피레네 산맥을 다시 넘는다. 이 ‘수미쌍괄’의 형식 안에 스페인의 풍물과 인성과 생활양식이 흥미롭게 기술돼 있다.

특히 반어법을 적절히 활용한 문체는 글맛을 돋운다. 가령, 피레네 산맥 나바라 공국의 총사령관을 지낸 드 카주 장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위대한 군인으로 찬양받았다”고 한 뒤 곧이어 “바꿔 말하면 그는 악명 높은 살인마였다”고 덧붙이는 식이다. 이런 풍자의 정신은 욕망의 표출을 두려워하는 스페인 사회의 엄격한 종교적 관습을 비아냥거릴 때 더 적실해진다. “인간은 어디서나 금지된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그들에게서 그 의무의 수행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전도자’답게 이 기행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연애의 파트너를 발견하는데, 그 사랑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줄기를 구성한다. 그가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고 분별력과 자제심을 발휘하는지를 보면, ‘난봉꾼’이란 말보다 ‘이상적 연인’이라는 별칭이 훨씬 더 그의 본모습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로서는 이그나시아를 유혹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그나시아가 사랑을 위해 태어난 여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에게 사랑의 눈을 뜨게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핑크빛이 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카사노바는 말년에 그가 젊었을 적 그렇게 거부했던 기독교로 다시 돌아갔던 모양이다. 세상과 작별하는 침대에서 그는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제1장 스페인으로 떠나다
 
(p.44)
 
"나와의 만남을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을 품에 안지 않겠소." (2백44쪽 전후) 스페인 여성 이그나시아와의 사랑을 서술한 대목
 
"정사(情事)의 목표는 향락인데, (스페인에서는) 이 향락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도 하지만 또한 무조건 금지되기도 한다. 그래서 비밀이 생기고 음모가 꾸며지는 것이며 영혼이 종교에 의해 강요되는 의무와 그 의무에 저항하는 열정의 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고뇌하는 것이다."
 


첨부화일 출처]

http://www.kungree.com/know/know25.htm

http://www.kungree.com/know/know26.htm

http://www.kirjasto.sci.fi/casanova.htm

 

 

 

[원초적프런티어] 섹스전도사 카사노바 인생유전

 


[기타] 2002년 02월 17일 (일) 

  
"못난 사내나 창녀를 찾아다니기 마련이지. 내가 눈길만 주면 귀족 부인들도 뜻을 알아차리고 코르셋을 여는데…." 소문난 호색가이며 훗날 바람둥이 남자를 일컫는 보통명사가 된 카사노바는 한시도 식을 날이 없는 자신의 침대를 가리키며 이처럼 자랑스러워했다.


화려한 로코코 시대 중에서도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였으며 섹스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생갈트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 지오반니 지아코모 카사노바(1725∼1798)는 베네치아산 종마로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맡은 바 소임(?)에 충실했다.

 

카사노바의 첫 경험은 열 살이 될까말까 한 나이에 치러졌다. 스승의 딸을 통해 여자를 배운 그는 사춘기로 접어든 15세에 성직에 입문했음에도 명문가의 아가씨들을 줄줄이 울게 만들었다. 교황 비서직을 포기하고 로마로 향한 무작정 여행에서 만난 유부녀 루크레지아와 격렬한 관계를 맺은 것도 10대 때 해치운 일 중 하나. 가장 독특한 애인은 거세된 남성 소프라노 가수로 카사노바는 끝까지 그를 여자라고 생각했으며 결혼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프닝에 불과했다. 20대가 된 그에게는 쾌락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관심 분야이던 마술로 부유한 귀족의 양자가 된 카사노바는 박식한 머리와 새로 얻은 재산, 그리고 멋진 외모로 여성들을 녹이기 시작했다. 녹이는 것도 좋았는데 어찌나 정도가 심했는지 자신의 고향인 베네치아 정부로부터 풍속사범으로 찍혀 평생 동안 영구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카사노바가 만난 상대는 일일이 호명할 수 없을 정도. 수녀가 있는가 하면 몸과 재산을 모두 바친 후작부인도 있고, 매춘부는 말할 것도 없으며 귀족 부인, 시골의 순박한 처녀, 그리고 자신의 딸일지도 모를 소녀까지도 명단에 들어 있었다.

 

여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타고난 명석함으로 세상의 돈과 권력을 모두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카사노바는 그를 후원하던 듀페 후작부인의 미움을 사 프랑스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뿐 아니었다. 스페인에서는 투옥되었는가 하면 이탈리아에서도 다시 추방되어 그는 초로의 몸을 볼로냐의 허름한 여관에 누일 수밖에 없었다.

 

60세가 된 그에게 주어진 건 한 귀족의 개인 사서직이었다. 그곳에서 공상과학소설,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 수학서적 등 여러 종류의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말년의 카사노바는 고립에서 오는 고독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무시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60대 후반, 자신이 성불능이 되었음을 충격적으로 고백한 카사노바는 73세를 일기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사망원인은 성기로 감염된 어떤 질병 때문이라고 알려졌는데 "기나긴 사랑의 전쟁 끝에 정액 대신 피를 흘렸다"는 그의 글을 미루어 볼 때 만성 전립선염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기도 한다.

 

<자유기고가> 출처: 굿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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