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7일 월요일

이태리 여행기 업데이트

현재까지 올린 이태리 여행기는..

 

01. 출발 (2004.09.11.토)                         :http://blog.naver.com/nkpower/5938533

02. 베네치아 도착 (2004.09.11.토)            :http://blog.naver.com/nkpower/5938525

03. 밀라노 가는 길 (2004.09.12.일)           :http://blog.naver.com/nkpower/5938516

04. 유벤투스 대 브레시아 (2004.09.12.일)  :http://blog.naver.com/nkpower/5938509

05. 밀라노 (2004.09.12.일)                      :http://blog.naver.com/nkpower/5938501

 

05. 밀라노 편을 새로 올렸습니다.

 

나머지는.. 계속 올라가지요~!! (언제?)

2004년 9월 25일 토요일

화려한 베네치아에 어울리지 않게 곤돌라가 검은색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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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원래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섬이 아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육지에서 베네치아 섬까지 다리를 놓아 연결하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육지가 반, 물이 반으로 구성하고 있다. 크게 4개의 섬과 170여개의 운하로 이 도시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하는 넓어, 육지로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은 길로 되어 있다. 그래서 베네치아 시민들은 길보다는 운하를 이용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 바로 배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폭이 넓다란 배가 아니라 폭이 좁고 날씬한 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후 배는 사용자에 맞게 자꾸만 고쳐서 사용하였다.

 

오늘날 베네치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 16세기에 처음 등장한 “곤돌라”다.

 

곤돌라는 처음부터 검은 색은 아니었다. 처음에 등장했을 때 곤돌라는 부자들의 소유물처럼 엄청나게 화려하게 꾸며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서로 부를 자랑이나 하듯 경쟁심을 발휘하여 점차 많은 돈을 곤돌라에 투자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곤돌라는 화려하게 꾸며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의자가 나무였다가 나중에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제 대리석까지 등장했다.

 

이러니 베네치아의 사회는 자꾸만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가진자와 없는 자간에 위화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가진자의 휭포었다.” 그렇게 자꾸만 낭비가 심해져 현대 사회처럼 사회에 물의를 빚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정부는 이 곤돌라 사건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때에도 오늘날처럼 사회 정화 위원회와 비슷한 워원회가 있어, 사정의 바람은 이 위원회에서 곤돌라 제작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때 찬바람을 맞은 곤돌라는 검은 색으로 통일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출처 :http://swpk.com.ne.kr/venezia.htm

[펌] 다다르다 - 곤돌라와 베네치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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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해적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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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om.. have a good day....h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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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이상의 곤돌라는 만들수 없다...."라는 사실과 역사속 전설이 맞물린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곤돌라를 만들 당시.. 당시의 장인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가 하나도 없어지게 되는 날 . 그날이 바로 베네치아가 수면밑으로
영원히 가라앉는 날이다..
 
현재 베네치아의 곤돌라는 1년에 1개정도씩. 부식되어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있으며, 남은 수는 대략 90여개 정도..
그리고 현대의 과학자들과 연구원들이 밝혀낸 사실은 목조로 버티고 있는 베네치아의 모든 섬들이 앞으로 100년정도 지나게 되면 , 목조의 부식으로 가라앉게 된다라는 사실이다.
 
이 어찌 공교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런 예언..
 
앞으로 베네치아 가실 분들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런 느낌으로 곤돌라를 다시 한 번 보세요.
 
느낌이 다르게..
 
이상.. 떠도는 말이였습니다.
 
 
 

 

[펌] 물고기를 닮은 - 베네치아 형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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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섬은 100여개의 섬과 400여개의 다리와..2000개의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다.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 수상도시의 계획이..점점 더..도시가 번성되어 가면서..

 

의도적인지는 몰라도 이런 모양이 되어 버렸다..

커다란 물고기가 알을 낳은 형상이....

 

왼쪽 밑의 작은 물고기 모양의 섬이..LA Giudecca라는 섬이고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섬에 방파제

 

역활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섬들이 자연 섬이 아닌 인공섬인 것이 더욱더 놀랄만하지만.....

[펌] 피의 역사 - 두칼레 궁전의 붉은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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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최고의 부와 명성을

간직하고 있는 두칼레 궁전이지만..

 

그 역시.. 우연으로

이루어진건 아닌것 같다.

 

저기 보이는 두칼레 궁전의 2층 기둥....들에

유난히 빨간색으로 보이는

2개의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두칼레 궁전

앞 광장에서 ...

 

당시의 절대 권력자에게..

반역을 꾀하거나, 베네치아의 자치질서를 어긴 사람들에게 참수형 처리를 하였고,, 이 사람들의

머리를 바로 저 기등에 메달았다고 한다..

 

바로 그 사람들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들어

오랜 기간동안 지워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빨간색이란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한 색인 것 같다..

[펌] Campanile - 베네치아 산마르코광장 종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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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에서 건물 꼭대기나 옆에 세워서 종을 매달아 치도록 만든 탑

 

이 종탑에 대해서

흘러다디는 얘기는

첩탑 밑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 부분에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베네치아의 흔들림이나 기울어짐에 대한 방비로 커다란 구를 설치해 놓았다고 한다.

구가 이 탑을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중심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더 거짓말 같은 얘기는

그 구가 설치되어 있는

저 부분이 진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라는데...

 

거짓말 같아도 믿을 수 밖에.(그 당시에 진공이라...)

1902년 무너져 다시 세웠다니 증거도 없고..흠...

 

 

하여튼 높이가 92미터라고 하니, 그당시로서는 엄청난 크기였겠지??

 

정말 신비한 작은 나라인 것 같다..

 

마치.. 우리나라 처럼..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펌] 탄식의 다리.....그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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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으시시... 왼쪽과 오른쪽.. 너무 상반된다..

 

오른쪽이 궁전 감옥.....보통 감옥하면 ,,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서 어느 정도는 떨어져서 위치해 있는것이 통상적인 일이지만.. 왜 베네치아에서는 궁전 바로 옆에 그것도 저런 화려한 다리로 연결되어 있을까??

 

현재는 어느정도로 감옥내부의 감방이 확장되어 있지만...처음 감옥을 건축했을때는 말 그대로..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또 ,, 다리를 구부리고..음..그러니깐.. 요새 서커스에서 나올듯한 자세로

웅크리면 간신히 들어갈수 있는 크기였다고 한다...말그대로...개집만큼의 크기..

 

기록(뭐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에 의하면 수감자에서 생존자는 단 1명 이였다는 기록이..있었네요.

(이 단 한 사람이 그 유명한 카사노바이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런 크기의 감방에서 건강했던 사람도 몇일만에 시체가 되어 나왔고,, 또.. 몇일을 버티고 죽지

않는 사람들은 전염병을 지니고 있던 쥐나..뭐.. 그런것들을 감방에 넣어 병으로 죽게 했다고 한다.

정말 잔인하지...베네치아 사람들.....

 

주로 궁전감옥에는 정치범이나,, 살인범..등등이... 수감되었다고..한다.

 

정치범들은 주로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가,, 최고 권력자인 doge에 의해 미움을 받아 하루아침에

죽음으로 이르는 저 감옥으로 직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옥이라곤 하나 밖에 없어서.. 이 감옥도 예약이 있었다고 합니다..(수백명의...사망예정자들..TT)

 

그들은 궁전내부의 가장 화려한 대회의실에서 수감판결을 선고받고 바로 저 다리를 건너 수감되어 지는데.. 사진을 찍고 있는 위치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바다를 잠깐동안이나마 볼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어찌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수감되어지면 바로 죽는 것이니까요..

 

그야말로 탄식의 다리라고 할 만하다...그야말로...

 

모두들 죄 저지르지 말고 사십쇼....휴우.....

 

모두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키 위해 사용했던 정치술이였지만,, 이 방법이 베네치아의

질서를 유지케 했다는 일설이..

 

여기까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9. 신념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

⑨ 신념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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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세느 강변, 노틀담 사원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고서의 매력에 빠져 떠날 줄 모르는 장소다. 50여년의 세월을 고서와 함께 지내온 이곳 주인 휘트먼씨. 그는 특별한 손님이 오면 세계의 대문호들과 찍은 사진을 진열해 놓은 방으로 손님을 안내한다.

 

카사노바를 알기 위해 한국에서 왔다며 그에게 명함을 내밀자 내게도 이같은 ‘특별 배려’를 해줬다

 

“카사노바는 재미있는 인물이지요.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를 반박하는 저서를 남길 만큼 자신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백발의 그는 카사노바에 대해 자못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앞에 나는 책을 한 권 꺼내 놓았다. 카사노바가 1779년 쓴 볼테르 비평서의 영인본. 카사노바가 말년을 보냈던 체코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에서 내가 구입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 카사노바는 볼테르의 철학과 사상, 특히 종교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볼테르는 18세기 계몽주의를 주도했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 그런 볼테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카사노바가 바로 우리가 알아왔던 희대의 바람둥이와 동일인이란 말인가? 우리는 법학박사이자 이탈리아 계몽주의 사상가로서의 카사노바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8세기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롯해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문을 두드린다”는 볼테르의 외침에 심취했다.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볼테르를 만나는 것은 철학자로 혹은 계몽주의자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카사노바도 1760년 스위스에서 볼테르를 만났다. 그러나 볼테르와의 만남에 대한 카사노바의 기억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평소 루소마저도 사생아, 배반자 유다, 사기꾼 등으로 폄하해 마지않던 볼테르였으니 카사노바를 홀대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그들이 처음 만나 나눈 대화를 보면 카사노바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카사노바〓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군요. 20여년간 저는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볼테르〓 앞으로 20년간 제게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가서 수업료 내시는 것을 약속해 주십시오.

 

카사노바〓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 드리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겉으로는 매우 우아했으나 속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왜 볼테르가 그렇게 신랄하게 말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카사노바는 볼테르를 공격하는 글을 썼다. 카사노바는 “볼테르가 본명(프랑소아 마리 아루에) 대신 필명인 ‘드 볼테르’를 사용함으로써 은근히 그가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드’란 말은 귀족의 이름 앞에 붙는 단어다.

 

카사노바에겐 일관성있는 철학적 신념이 있었는데 자유 의지가 그것이다. 카사노바의 생애를 점철한 끊임없는 애정 행각도 바로 이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방탕과 육체적 쾌락으로 물든 그의 삶을 보고 종교인 카사노바의 모습이 가당찮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도 한 때는 카톨릭 사제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크리스천으로 자처할만큼 강한 신앙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카사노바의 자유 의지에 대한 신념 속에 신과 종교가 들어있던 것이다.

 

카사노바는 문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삶과 이성이 종교적 영향 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종교관은 당시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자서전 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심할 때 자유를 상실한다. 운명의 힘에 의존한다면 신께서 인간에게 이성과 함께 부여한 자유마저 상실하게 된다.”

 

어떠한 삶의 원칙에 매달리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살고자 했던 카사노바는, 그로 인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의 일관된 주제는 자유였다.

 

카사노바의 삶과 철학을 프랑스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짓기는 어려우나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은 늘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명된다. 프랑스 혁명이 사회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자유 평등의 혁명이란 점에서 카사노바의 철학과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자서전 기록 중에는 프랑스혁명을 예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허기로 고통받아온 것처럼 나도 굶주림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시골의 한 농가에 숨어 들어 약 50마리의 훈제 청어를 훔쳐와 단 며칠 만에 먹어 치울만큼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나는 베네치아의 철옹성 같은 감옥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지낼 무렵, 귀족들의 낭비벽과 어리석음을 꼬집으며 경제파탄이 오고 끝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카사노바는 평등을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절실히 갈망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여인들과의 사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의 사랑은 늘 자유를 꿈꾸고 금기를 넘어서지 않았던가. 그의 사랑은 늘 평등했다.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여인들을 동등하게 대했고 늘 존중했으며 누구와도 차별없는 사랑에 빠졌다. 이런 그의 태도는 여인들에게 늘 호감을 사는 중요한 태도였다.

 

시대의 아웃사이더로서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꿈꾸던 카사노바는 프랑스 혁명의 열매를 채 누리기도 전에 죽었다.

 

카사노바가 남긴 이런 글이 떠오른다.

 

‘내가 가진 커다란 재산은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부당함에 굴하지 않는 내 자신의 주인이라는 점이요….’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jimkim@antiquus.co.kr

 

카사노바 다시보기 - 8. 타고난 예능적 기질, 넘치는 끼

 

⑧ 예술가 카사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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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박물관 내부의 모습,
카사노바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

 

많은 관광객들이 비좁은 골목의 상점 앞을 서성일 때, 한 쪽에서 들려오는 집시의 구슬픈 바이올린 연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카사노바도 바이올린을 잘 켜는 연주자였다. 베네치아 산 사무엘 극장의 연극배우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카사노바와 그의 형제들은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것 같다.동생인 프랑소와 카사노바는 유명한 전쟁 화가였고, 또다른 동생인 쟝 카사노바는 독일 드레스덴의 제후 프레드릭 아우구스트 3세 밑에서 왕립 화가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일했다. 카사노바는 그림, 음악, 춤 등 예능 방면에 만능 탤런트였다.

 

18세기 유럽의 어린이들은 성당에서 바이올린 등 여러 악기의 연주법을 익혔다. 카사노바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음악적인 감각은 탁월해 21세 때 베네치아 산 사무엘 성당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어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생계를 위해 연주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만이었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자신이 바이올린 연주가라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1750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카사노바는 자신의 음악 재능 덕분에 당시 청렴성과 예술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연극배우 마농 발레티가를 만나게 되고 가깝게 지냈다.

 

파리시절인 1752년에는 처음으로 희곡을 쓰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오페라 ‘조로아스트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드레스덴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체코 둑스성에 머물던 시절, 카사노바는 작곡가 모차르트를 만난다. 여기서 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죠반니’의 가사를 고치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카사노바와 모차르트는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체코 둑스성 주인인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감각적 쾌락을 즐겼던 두 사람의 공감대는 각자 예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프라하에 위치한 모차르트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모차르트의 많은 악보와 유물 사이에 걸려있는 카사노바 사진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 두 사람이 예술적으로 교감을 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말년인 1791년 자신의 삶을 소재로 3막 짜리 희곡을 발표했다. 이 연극은 1971년 이탈리아에서 카사노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연됐다.

 

카사노바는 미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발휘했다. 그는 사물에 대한 많은 소묘를 남겼다. 특히 그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760년 로마에서는 화가 라펠 맹그스, 예술사가 요한 빈켈만 등과 만나 예술사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했다.

 

카사노바는 예술 이외에 자연과학 신비술, 그리고 잡기에도 능했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 철학이 확산됐고 한편으로 속물적 향락욕과 신비주의에 대한 맹신이 뒤섞였던 혼돈의 시대 18세기. 이러한 복잡한 와중에 별자리와 카발라(유대 신비주의)에 능통했던 카사노바는 자신의 재능을 돈과 출세를 위해 활용했다.

 

신비술사 카사노바에게 자신을 환생시켜달라며 맹목적으로 의존한 여인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로부터 카사노바는 많은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카사노바가 프랑스 후작부인 마담 뒤르페에게 남자로 환생시켜 주겠다면서 수많은 재정적 후원을 받아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카사노바는 프랑스 정부의 특사자격으로 네덜란드에 갔을 때 카발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자연과학에 대한 카사노바의 지식은 아주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는 18세기 연금술 단체였던 로젠크라이제 단원이었고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여비를 벌기도 했다.

 

당시에는 연금술 사기꾼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루이15세도 생 제르맹 백작과 같은 연금술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 자신의 성에 실험실을 지어주고 많은 돈을 대주며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보라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카사노바의 연금술은 학문적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았다.

 

카사노바는 도박꾼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의 대부분 도시에는 도박장이 있었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도박은 여인들과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카사노바에게 부족한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도박이 지나치게 성행하자 많은 도시에선 도박을 금하기 시작해 카사노바는 정부 관리의 눈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도 했고 때로는 자신의 죄를 면죄받기 위해 도박장을 고발하는 스파이 노릇도 했다.

 

카사노바에게는 이렇듯 예술성과 속물적 근성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카사노바에게는 이처럼 탁월한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사로잡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법학박사로, 연주가로, 화가로, 작가로, 정치가로, 사업가로 다양한 능력을 보여 주었던 카사노바. 그의 삶의 이면에는 카발라, 연금술, 도박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만 했던 비참함이 숨어 있었다.

 

김 준 목 (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대표)jimkim@antiquus.co.kr

 

 

카사노바 다시보기 - 7. 유행을 선도한 베스트드레서

⑦ 베스트드레서

 

해마다 2월 말이면 베네치아는 축제의 도시로 변하고 술과 춤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축제인 ‘마디 그라스’가 열리기 때문이다.

 

화려한 바우토(마스크)와 카발로(망토)를 쓴 관광객들이 산 마르코 광장으로 몰려들면 축제는 시작된다. 축제 물결 속에 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하게 등장하는 이가 있으니 그가 카사노바(실제로는 카사노바 역할을 하는 배우)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로코코 의상의 극치인 카사노바의 패션을 흉내낸 의상을 입고 그의 뒤를 따른다. 카사노바는 옷을 잘 입는 멋쟁이로도 유명했다. 오늘날 베네치아의 축제에서도 그가 입었던 패션을 그대로 흉내낼 정도니까. 카사노바의 회고록을 유행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카사노바가 시대의 멋쟁이로서 당시(18세기)의 유행을 선도하는 화려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카사노바에게 패션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성적인 신호를 보내는 삶의 중요한 요소였다. 독특하고 화려한 의상과 가발 마스크 손수건 모자 그리고 마차까지 카사노바는 패션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복장은 그 사람의 신분과 재력을 말해 준다. 복장을 연출하는데 귀재였던 카사노바는 백작이 되기 원하면 백작옷을 입고 공작이 되길 원하면 공작옷을 입었다.

 

그의 화려한 패션은 말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체코 둑스성에서 초라하게 은둔하던 말년 시절, 카사노바는 주변의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하얀 깃털을 꼽고 금사로 수놓은 양복과 값비싼 빌로드 조끼를 입고 다녔다. 또 정장 차림으로 무도회에 나가 장중한 스텝을 밟았다. 늙고 가난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가꾸는 데 열정을 불태웠던 카사노바. 체코의 둑스성에서 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카사노바의 섬세한 자기 사랑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표현으로서 옷을 중시했던 카사노바는 돈이 생기면 멋진 의상을 먼저 마련했던 남자였다. 카사노바는 자신만의 개성을 연출하기 위해 스스로 디자인한 의상을 입기도 했다. 조각천을 연결하여 화려하고 재미있는 의상을 만들어 입고 로마의 축제에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 많은 상류층 여인들에게 호감을 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도 그의 외모를 칭찬한 바 있다.

 

바로크의 무겁고 장중한 형식이 가볍고 장식적인 것으로 변한 로코코풍의 의상은 인간의 자유와 감성을 중시한 패션이다.

 

여자의 옷은 목과 가슴을 노출하여 더욱 관능미를 과시했고 남자는 넙적 다리의 곡선을 드러내서 육감적 남성미를 과시했다. 카사노바는 늘 이런 유행을 선도하는 의상을 입고 다녔다.

 

당시 패션의 일종이었던 마차. 여기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카사노바가 어느 상인과 그의 딸을 자신의 마차에 태워주었을 때 그 딸이 속옷을 입은 광경을 그는 개탄의 눈길로 바라본 적이 있다(18세기 사교계 미녀들은 때로 속옷을 입지 않았다!).

 

카사노바가 유럽의 전역을 여행하면서 이용한 마차는 운송수단이면서도 귀족의 호화로운 사치품이었고 그의 사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구였다. 그의 회고록에는 마차 안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어 마차 앞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질 때 합승한 농부의 아내가 경련을 일으키며 카사노바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벼락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해 그녀의 옷을 들추고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마차의 흔들림이 그 일을 도와 주었다.

 

자신의 남편이 바로 뒤에 따라오는 마차에 타고 있음에도 그녀의 입가에 어느새 만족의 미소가 흐르는 걸 보고 카사노바가 여유있게 말했다.

 

“벼락과 천둥에 대한 여인의 공포를 치유할만한 건 이 것 밖에 없소. 나는 그걸 알고 있오.”

 

18세기, 거의 매일 열리는 가장무도회와 연중 행사인 대형축제, 그리고 이런저런 음주모임은 유럽 전역을 사치풍조에 빠져들게 했다.

 

당시 귀족들은 벨벳 공단, 금은 장식, 리본, 견직 모자, 깃털 장식, 가면, 손수건, 우아한 레이스에 날이 갈수록 사치를 부렸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돈을 모아 어느 정도 부자가 되면 이런 귀족들의 흉내를 내려고 안달이었다.

 

특히 귀족들이 즐겨쓴 마스크는 카니발이나 공공축제때 군중 속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마스크를 쓰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아 진다. 신분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한다. 도박으로 돈을 탕진한 귀족들이 마스크를 쓰고 산 마르코 광장에서 구걸을 하기도 했다.

 

카사노바도 여인을 유혹하는데 마스크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18세기 사람들이 유행에 따라 계속 옷차림을 유지하려면 경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재산가도 휘청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랑과 관능, 쾌락을 위해 기꺼이 패션에 많은 돈을 지불했다. 옷을 잘 입어야 여자를 유혹하고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랑은 하나의 광기였다. 카사노바도 자신의 글에서 사랑은 광기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사치로 인해 사람들은 결국 추락하고 파멸하게 된다.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카사노바 역시 많은 돈을 그렇게 썼고 끝내는 추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패션을 통해 개성과 자유를 추구했던 카사노바. 거기에 특유의 열정이 더해짐으로써 카사노바는 유행의 선구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대표)jimkim@antiquus.co.kr

 

# 앙드레 김이 본 카사노바 패션

 

카사노바의 패션에서 우리는 그가 풍미하며 살았던 18세기 유럽 복식문화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평생 감각의 자유를 추구하였던 카사노바답게 그의 옷에 나타난 색상, 디자인, 액세서리 이 모든 것에는 탁월한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감성이 넘쳐 흐르고 있으며 미래지향적인 그의 의식세계를 느낄수 있다.

 

특히 조각 천을 모자이크한 그의 패션 감각은 지금의 디자이너들도 파격적 감각으로만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였고 절묘한 색의 조화와 디자인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18세기 로코코의 화려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심미안을 갖고 연출한 그의 옷에서 우리는 시대의 로맨티스트로서 문화를 선도했던 그의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패션감각은 각자의 개성과 감성이 자유로이 표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사노바 다시보기 - 6. 맛의 로맨티스트

"풍성한 식탁은 사랑을 위한 전주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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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맛의 로맨티스트

 

"나는 이성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그래서 늘 사랑을 했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

 

이렇게 말한 열정적인 남자 카사노바.

 

카사노바는 여인이 마음에 들면 먼저 풍성한 식탁으로 초대하곤 했다. 그는 마치 무대에 올릴 예술 공연을 준비하듯 두 사람의 사랑에 맞는 식탁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서로의 마음을 가열시킬 독특한 요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다.

 

그는 여인의 타입에 따라 술과 음식을 다르게 선택했다. 머리색과 피부색 그리고 신분과 취향에 이르기까지 여인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간파해 샴페인과 포도주, 제철에 나는 싱싱한 해물들을 준비했다.

 

카사노바의 식탁은 사랑의 심포니를 위한 전주곡이었다. 식사와 대화를 통해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한 전희(前戱)였던 셈이다. 한편 카사노바에게 식사는 평생 동안 계속된 여인들과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카사노바는 그를 거쳐간 여인들을 추억하면서 그들과 어떤 술과 음식을 먹었는지를 다 기억했다.

 

훌륭한 맛에 젖는 행복한 밤, 식사는 뜨거운 입맞춤으로 끝난다. 그리고 나서 뜨거운 관능을 향해 달려간다.

 

베네치아 음식은 베네치아의 앞바다인 아드리아해가 제공해 주는 풍부한 해산물을 사용해 18세기 유럽 미식가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진행된 혁명과 개혁의 영향으로 프랑스 요리가 알프스를 넘어 전통적인 베네치아 음식과 섞였으며 이로 인해 마늘과 양파의 사용이 보편화됐고 허브, 약재, 향신료 등이 모든 음식에 기본적으로 사용됐다. 오늘날로 치면 퓨전 음식이 됐던 것이다.

 

지금도 베네치아의 식당에 가면 당시 카사노바가 즐겼던 요리들이 대중적인 메뉴로 올라 있다. 또 베네치아의 고등학교에서는 오늘도 학생들에게 카사노바 요리의 비법을 가르치고 있다.

 

올봄 나는 베네치아의 바르바리고 요리고등학교를 방문해 요리주임 마르티니와 미켈라를 만났다. 미켈라는 1998년 카사노바 사후 200주기를 기념해 카사노바가 즐긴 요리책을 펴낸 바 있다. 그는 시종 즐거운 웃음을 띤 채 “음식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즐긴 사람이 바로 카사노바”라고 강조했다.

 

카사노바는 독특한 미식가답게 메추라기 요리, 영계 스프 등 이색적인 음식을 즐겼다. 그러나 그의 음식에 대한 창의력은 ‘남성의 힘’을 증가시켜 주는 것에만 발휘됐다고 볼 수 없다. “나는 늘 나의 여인들이 바라는 것을 준비하고, 또 채워주려고 노력했다”는 고백처럼, 카사노바는 낭만적 사랑을 갈망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식탁에서 먼저 사로 잡았다. 사랑을 위해 식탁에 쏟은 그 열정, 카사노바는 그래서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카사노바는 73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선 매우 장수한 셈이다. 여기에는 카사노바의 식탁의 비밀이 숨어있지 않을까? 이제 미식가 카사노바에게 사랑을 불태우기 위한 비법 세가지를 배워보자

 

하나.굴(석화)이다.

 

신선한 굴은 남성을 위한 최고의 음식. 카사노바는 굴을 최음 효과, 사랑의 전희, 사랑의 유희에 최고의 음식이라 극찬했다.

 

“어느 날 에밀리와의 식사 때 나는 굴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약간의 실수로 굴이 그녀의 가슴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손으로 떨어진 굴을 주으려 했으나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 단추를 풀렀다. 그리곤 내 혀로 그녀의 가슴에 떨어진 굴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옷을 자연스럽게 벗겨 내렸다. 알몸을 드러낸 그녀의 가슴에 계속해 하나하나 굴을 떨어뜨리며 나는 계속해 두 입술로 삼켰다. 이것은 나와 그녀의 몸을 신선한 굴 맛 이상의 감각으로 전율케 했다.”

 

전통적으로 아드리아해의 굴은 맛이 일품이며, 당시 교역이 활발하던 이곳의 상인들은 굴을 바닷물에 담아 밀라노, 빈, 부다페스트까지 수송했다.

 

요리방법.최고의 맛은 신선한 굴에 레몬 즙을 뿌려 날로 먹는 것. 이 때 버섯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 숭어.

 

베니스 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생선은 숭어다. 당시 숭어알을 소금과 식초에 절여놓은 것을 보타르가라 하며 베니치아의 캐비어라 불렸다. 보타르가는 맛이 뛰어나고 정력에도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사노바는 숭어 알집을 말린 후 여인과의 사랑에 때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카사노바의 콘돔이었던 것이다. 당시 성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환경을 생각하면 그의 머리가 비상했음을 알 수 있다.

 

요리방법은 소금, 식초로 잘 절여진 보타르가에 레몬즙, 후추, 올리브 오일을 뿌려 먹는다.

 

. 계란 흰자 샐러드.

 

M.M과의 첫날 밤에 일곱시간 정사를 할 때였다. 그는 혹시 정력이 모자랄까 두려워 계란 흰자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카사노바는 이것을 최고의 최음제라고 고백했다.

 

요리방법. 식초에 샐비어 잎, 박하, 통 파, 통후추, 겨자를 넣고 끓인 뒤 2주간 잘 밀봉해 둔다. 계란을 완전히 익혀 노른자를 빼고 흰자를 얇게 썬 다음 이 식초 소스와 소금, 올리브 오일을 뿌려 먹는다.

 

# 카사노바와 초콜릿- 성욕증진 믿음…여인들이 남자들에게 즐겨 대접

 

카사노바를 사랑했던 많은 여인들은 카사노바에게 초콜릿을 대접했다. 초콜릿이 성적 흥분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였다. 카사노바는 초콜릿 덕분에 여인들과 더욱 격정적인 사랑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초콜릿의 원료는 카카오 나무의 열매 카카오빈으로,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1520년 스페인 황실에 소개된 후 귀족들의 음료로 각광 받았으며 카나노바가 살았던 18세기에는 초콜릿 음료에 바닐라와 계피 등의 향신료를 첨가하여 즐겨 마셨다고 한다.

 

특히 왕의 총애를 받던 여인들은 초콜릿의 성욕 촉진 효능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성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왕이나 연인에게 초콜릿을 대접했고 흥분을 높이기 위해 남용하기도 했다.

 

오늘날 발렌타인 데이 등에 연인들이 주고 받는 선물로 초콜렛이 애용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현대과학으로는 초콜릿의 주 성분인 카카오와 설탕이 성적 흥분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고 있다.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jimkim@antiqu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