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3. 코스모폴리탄

"투옥… 탈옥… 그리고 끝없는 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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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코스모폴리탄

 

베네치아 두칼레궁 정문 앞은 오전 10시가 되면 ‘카사노바 투어’에 참가하려는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이 투어는 카사노바가 투옥되었던 두칼레궁 내부의 감옥을 보여준다. 가이드가 허락하는 곳만을 볼 수 있으며 촬영은 일절 금지된 진지한 투어인데, 이 투어에 참가하면서 카사노바가 왜 감옥 생활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카사노바의 삶과 변신은 상류층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그는 신분 상승을 위해 청년 시절 사제가 되기도 했고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생계를 위해 극장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하던 1746년 어느 날 베니치아 귀족 브라가딘과 만난 것이다. 카사노바의 나이 21세 때였다.

 

카사노바는 길거리에서 심장 발작으로 심하게 고통받던 그를 구해 주었고 그의 치료까지 담당하게 됐다. 이로 인해 카사노바는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많은 용돈을 받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사노바의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개성은 당시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던 베네치아 정부 관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1755년 여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피온비 감옥(두칼레궁 안에 있는 감옥으로 감옥의 천장이 납으로 되어 겨울에 춥고 여름에는 몹시 더워 납감옥이라고도 부름)에 수감됐다.

 

그는 집을 급습한 종교재판소 요원들에게 서류, 책 등을 압수당한 채 체포돼 곤돌라(앞이 뾰족한 배)에 태워져 감옥으로 옮겨졌다. 침대 머리에서 압수된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호라티우스, 솔로몬의 지혜 등 수많은 고전들이었다.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침대에 고전이 놓여 있었다니,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는 인간상을 보는 듯하다.

 

당시 카사노바는 유럽의 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던 ‘프리메이슨’이란 단체의 단원이었으며 베네치아 주재 외교관들과도 교분을 갖고 있었다.

 

투옥 사건을 계기로 카사노바는 평생 고향을 떠나 방랑객으로 살게 된다. 자유를 먹고 사랑을 마시던 그에게 한 평 남짓 좁은 감옥에서의 삶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삶의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그의 열망은 철옹성 같은 감옥의 납을 녹이고 그에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피온비 감옥을 탈출한 것이다. 1756년 탈옥할 때 카사노바는 이런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이제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며 당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소.’

 

피온비 감옥에서 탈출해 파리로 온 카사노바는 베네치아에서 알고 지내던 베르니스라는 프랑스 외교관을 만났다. 그는 카사노바에게 새로운 일자리와 프랑스 사교계를 소개했다. 로코코의 화려함이 가득했던 파리는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카사노바에겐 활력을 주는 곳이었다.

 

그는 30대 초반에 루이 15세가 주최하는 퐁텐불루성에서의 만찬에도 초대받아 자신의 탈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많은 프랑스 귀족들의 주목을 받았다. 카사노바는 담대함과 재능을 인정받아 네덜란드에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의 역량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이력이다.

 

그러나 역시 프랑스에서도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사업의 실패, 특사 임무의 실패 등으로 인해 프랑스를 떠나 유럽의 여러 곳을 떠돌며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나는 파리의 고서점에서 18세기 퐁텐불루성의 화려한 귀족 파티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나는 이따금 이 그림을 보면서 계몽주의자로서 계급과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던 카사노바가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동분서주했던 상반된 모습이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한다.

 

프랑스를 떠난 카사노바는 쾰른, 취리히, 아비뇽, 니스, 제노바 등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일을 구하려 했고 로마에서는 클레멘스13세로부터 교황청 기사 작위를 받았다. 카사노바의 회고록에는 그가 유럽 전역의 여러 나라 왕들과 권력자들을 만나고 다닌 일들이 흥미롭게 기록돼 있다.

 

39세 때, 감정이 변화무쌍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났을 때 카사노바는 능력에 맞는 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왕의 직설적인 태도에 압도되어 변변히 대답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 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사노바의 외모를 보고 아름다운 용모라고 칭찬했다.

 

이 말을 들은 카사노바는 대왕의 동성애적 기질을 꼬집으며 “제게서 발견하신 유일하고도 미미한 자질이 그 뿐인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카사노바의 문학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카사노바는 러시아를 방문해 예카테리나 여제를 만나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던 그레고리력의 사용을 권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와 날짜가 열흘의 차이가 났고 경제 외교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불편과 경제적 손실을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 머물 때 카사노바는 아무도 자신을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소개해 주지 않자 여제가 산책하는 길에서 하루 온종일 기다리고 서 있다 우연을 가장하여 여제를 만날 정도로 주도 면밀했다.

 

폴란드의 왕 보니아토브스키에게 정치 경제 등에 관한 자문을 해주기도 했고, 스페인에서는 식민지의 총독이 되려고 노력했다. 카사노바는 이렇게 늘 좋은 자리를 얻고자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그는 유럽의 국경을 넘나들며 화려한 코스모폴리탄적 삶을 살았다.

 

이후 40대를 거치면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그나마 유지해 오던 상류 사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면서 그의 삶은 귀공자에서 서서히 마이너리그, 그의 본연의 모습으로 추락한다.

 

그는 조국인 베네치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베네치아에서 만난 한 출판업자는 “베네치아는 그를 추방했지만 그는 언제나 조국 베네치아를 사랑했다”고 증언했다. 오늘날 베네치아 두칼레궁에 모여 카사노바 투어를 하는 관광객들은 이렇게 느낄 것이다. 어쨌든 베네치아는 카사노바의 고향이라고.

 

김준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대표)jimkim@antiqu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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