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8. 타고난 예능적 기질, 넘치는 끼

 

⑧ 예술가 카사노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차르트 박물관 내부의 모습,
카사노바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

 

많은 관광객들이 비좁은 골목의 상점 앞을 서성일 때, 한 쪽에서 들려오는 집시의 구슬픈 바이올린 연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카사노바도 바이올린을 잘 켜는 연주자였다. 베네치아 산 사무엘 극장의 연극배우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카사노바와 그의 형제들은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것 같다.동생인 프랑소와 카사노바는 유명한 전쟁 화가였고, 또다른 동생인 쟝 카사노바는 독일 드레스덴의 제후 프레드릭 아우구스트 3세 밑에서 왕립 화가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일했다. 카사노바는 그림, 음악, 춤 등 예능 방면에 만능 탤런트였다.

 

18세기 유럽의 어린이들은 성당에서 바이올린 등 여러 악기의 연주법을 익혔다. 카사노바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음악적인 감각은 탁월해 21세 때 베네치아 산 사무엘 성당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어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생계를 위해 연주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만이었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자신이 바이올린 연주가라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1750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카사노바는 자신의 음악 재능 덕분에 당시 청렴성과 예술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연극배우 마농 발레티가를 만나게 되고 가깝게 지냈다.

 

파리시절인 1752년에는 처음으로 희곡을 쓰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오페라 ‘조로아스트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드레스덴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체코 둑스성에 머물던 시절, 카사노바는 작곡가 모차르트를 만난다. 여기서 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죠반니’의 가사를 고치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카사노바와 모차르트는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체코 둑스성 주인인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감각적 쾌락을 즐겼던 두 사람의 공감대는 각자 예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프라하에 위치한 모차르트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모차르트의 많은 악보와 유물 사이에 걸려있는 카사노바 사진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 두 사람이 예술적으로 교감을 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말년인 1791년 자신의 삶을 소재로 3막 짜리 희곡을 발표했다. 이 연극은 1971년 이탈리아에서 카사노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연됐다.

 

카사노바는 미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발휘했다. 그는 사물에 대한 많은 소묘를 남겼다. 특히 그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760년 로마에서는 화가 라펠 맹그스, 예술사가 요한 빈켈만 등과 만나 예술사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했다.

 

카사노바는 예술 이외에 자연과학 신비술, 그리고 잡기에도 능했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 철학이 확산됐고 한편으로 속물적 향락욕과 신비주의에 대한 맹신이 뒤섞였던 혼돈의 시대 18세기. 이러한 복잡한 와중에 별자리와 카발라(유대 신비주의)에 능통했던 카사노바는 자신의 재능을 돈과 출세를 위해 활용했다.

 

신비술사 카사노바에게 자신을 환생시켜달라며 맹목적으로 의존한 여인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로부터 카사노바는 많은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카사노바가 프랑스 후작부인 마담 뒤르페에게 남자로 환생시켜 주겠다면서 수많은 재정적 후원을 받아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카사노바는 프랑스 정부의 특사자격으로 네덜란드에 갔을 때 카발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자연과학에 대한 카사노바의 지식은 아주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는 18세기 연금술 단체였던 로젠크라이제 단원이었고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여비를 벌기도 했다.

 

당시에는 연금술 사기꾼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루이15세도 생 제르맹 백작과 같은 연금술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 자신의 성에 실험실을 지어주고 많은 돈을 대주며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보라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카사노바의 연금술은 학문적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았다.

 

카사노바는 도박꾼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의 대부분 도시에는 도박장이 있었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도박은 여인들과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카사노바에게 부족한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도박이 지나치게 성행하자 많은 도시에선 도박을 금하기 시작해 카사노바는 정부 관리의 눈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도 했고 때로는 자신의 죄를 면죄받기 위해 도박장을 고발하는 스파이 노릇도 했다.

 

카사노바에게는 이렇듯 예술성과 속물적 근성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카사노바에게는 이처럼 탁월한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사로잡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법학박사로, 연주가로, 화가로, 작가로, 정치가로, 사업가로 다양한 능력을 보여 주었던 카사노바. 그의 삶의 이면에는 카발라, 연금술, 도박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만 했던 비참함이 숨어 있었다.

 

김 준 목 (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대표)jimkim@antiqu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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