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펌] 카사노바의 여정을 따라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영혼과 가슴에는 날개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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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바람둥이로만 알려졌던 카사노바의 이면에는 법학자와 사업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진지한 모습이 숨겨져 있다. 고서적을 모으다 우연히 카사노바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그 매력에 빠져버린 카사노비스트 김준목. 카사노바의 행적을 좇아 짧지만 행복한 여행을 다녀온 그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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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사노바의 초상화.
2 밀납으로 만들어진 카사노바가 글을 쓰고 있다.
3 국내 최초의 카사노비스트이자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의 저자 김준목.
4 김준목을 카사노비스트로 이끈 카사노바의 10권 짜리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

카사노바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 가지. 첫째 파도바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법학자로서 <볼테르 비평서>를 쓸 만큼 실력가였다는 것, 둘째 파리에 복권을 도입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프랑스의 염직 산업을 부흥시킨 사업가로 평가받았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모차르트 박물관에 초상화가 걸릴 만큼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이외에도 퓨전 요리를 만들거나 연극 대본을 쓸 정도로 창조적 욕구가 왕성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사노바는 왜, 우리의 머릿속에 바람둥이로만 기억되는 걸까.
“기록의 차이 아닐까요? 모차르트나 볼테르와 같이 유명한 역사 속의 인물들도 그에 못지않은 바람둥이였잖아요. 차이점이 있다면 카사노바는 자신의 연애기를 일일이 기록했고, 그들은 하지 않았다는 거죠. 카사노바의 자서전이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그의 진면목이 감춰진 것 같습니다.”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를 발간한 이후 화제를 모았던 김준목은 이제는 아예 카사노비스트라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와 더불어 카사노바와 고서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하는데, 카사노바의 여정을 좇는 투어도 국내에 곧 생길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은 친구에게서 받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사람의 운명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시작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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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적 수집은 영혼들과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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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때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카사노바가 머물렀던 로마.
2 카사노바 협회 회장 마리오 스테파니의 시집 발간을 기념해 만든 컵.
3 베네치아의 카사노바 생가.

젊었을 적,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군대를 제대한 후 김준목은 이탈리아 건축 자재를 수입하는 회사에 근무했었다. 무역회사인 만큼 해외 출장의 기회가 제법 많았는데, 이탈리아에 갔을 때 거리를 배회하다 벼룩시장에 들르곤 했다. 로마의 기차역 앞에는 몇 권의 고서를 쌓아놓고 파는 고서적상이 있었다. 주인이었던 크로아티아 화가는 같은 장면을 연속적으로 그리고 있어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림 속에 담긴 시간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던 그는 당장 그림을 사고 싶다며 5백 달러를 냈다. 여기에 감동한 크로아티아 친구는 낯선 이방인이지만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 친구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교외를 1시간 남짓 달리니 벽돌집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그저 낡았으려니 했는데, 4백 년 된 건물이라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잠시 쉬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는데, 보여줄 게 있다며 저를 창고로 데려가더군요. 창고 문을 여는 순간 곰팡이 냄새가 확 풍기데요. 그 안은 고서로 꽉 차 있었어요. 친구가 선물이라며 한 권을 주더군요. 그 책은 3백 년도 더 된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서와 처음 만났다. ‘책은 영혼의 보고다. 창고에 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영혼과 얘기한다. 나는 너에게 영혼을 선물하는 거다’는 친구의 말에 감동받았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서 수집에 재미를 붙였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그 친구를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친근해졌다. 때로는 고서를 수집하기 위해 사업은 동생에게 맡긴 채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고, 안티쿠스(www.anti-quus.co.kr)라는 서양 고서적 전문 사이트도 만들었다. 마침내 1998년, 런던에서 운명적인 만남과 조우했다. 카사노바의 10권짜리 자서전인 <내 인생의 이야기>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카사노바는 일단 아는 얘기라 반가운 마음에 사게 됐습니다. 1922년에 1천 부가 한정 출판된 희귀본이었어요. 조금씩 읽다 보니 카사노바에 대한 의외의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됐습니다. 아예 푹 빠져 하루 종일 그 책만 붙잡고 있었죠. 다 읽고 나니 더욱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카사노바, 그가 남긴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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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 그가 남긴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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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는 카사노바 기념관이 된 프라하의 둑스 성.
2, 3 카사노바가 즐겨 먹었던 정력 요리 석화와 달걀 흰자.
4 베네치아의 곤돌라.

카사노바의 삶은 베네치아에서 시작된다. 산 사무엘 극장 근처의 건물에는 이곳에서 그가 태어났다는 명판이 걸려 있는데, 그의 고향인 만큼 이곳에는 카사노바의 행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한 유서 깊은 파도바 대학에는 카사노바가 1742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비스트로에서는 카사노바가 창작한 각종 퓨전 요리를 맛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흔적이 짙게 남은 만큼 카사노비스트의 활동도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다. 현재 전 세계의 카사노비스트는 대략 2백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정기 모임을 갖고 자료를 모아 책까지 편찬했다고 한다.
추기경의 추천을 받아 성직자가 되려 했던 카사노바는 로마에도 머물렀다. 이곳에서 비록 성직은 포기했지만 여러 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을 했고 자취를 남겼다. 스페인 광장 옆에 있는 비아 콘도티(지금은 명품 숍이 즐비한 쇼핑가가 됐다) 거리에 있는 카페 그레코는 그가 아침을 즐겼던 곳이다. 유명 브랜드 부티크가 들어서 있어 그가 거주했던 호텔은 현재 사라졌지만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이다.
두칼레 궁전에서 탈출한 카사노바가 잠시 머물렀던 파리에는 그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곳곳에 걸려 있는 로또 복권의 간판이 바로 그 증거다. 카사노바는 루이 15세에게 복권 제도를 도입하라고 권했고, 복권 사업을 관장하는 책임자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외무부 특사 자격으로 네덜란드에 파견되었는데 염직물 가공 사업을 시작, 성공한 사업가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루이 15세로부터 퐁텐블로 성의 만찬에 초대받아 사교계의 유명한 귀족들과 어울리는 계기을 마련했으며, 타고난 패션 감각으로 18세기의 유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파리가 ‘카사노바는 이미 이곳을 떠났어요’라고 말해주는 도시라면, 프라하는 카사노바를 추억하게 하는 도시다. 프라하의 모차르트 박물관에는 그의 초상이 걸려 있고, 이곳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둑스에는 ‘카사노바 거리’가 실존한다. 그뿐이 아니다. 카사노바 여관이 있고, 그가 노년에 사서로 일했던 발트슈타인 가문의 성은 카사노바 기념관이 됐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둑스 성 근처의 세인트 바바라 교회 포도밭에서 끝을 맺었다.
“카사노바는 감각 추구를 통해 자기 인생의 행복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궁극적인 답이었죠. 그는 정말 자유와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어요. 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하며 에너지를 끌어냈으니 반하지 않을 자가 없죠. 그의 그런 점을 매우 동경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죠. 땅에 두 발을 딛고 영혼과 가슴에는 날개를 다는 것, 그게 제가 추구하는 인생의 주제입니다.”

최근 그는 수집한 <라퐁텐 우화>를 국내에서 소장본으로 재편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낮에는 회사(본업은 (주)메타티움의 대표이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자신의 컬렉터를 데커레이션하며 보낸다는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가져온 책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10년이나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벌써 2천5백여 권 정도 모았습니다. 아마 아파트 두 채 값은 날렸을걸요. 서양의 문화재 반출 문제 때문에 국내에 다 가져오지는 못했고, 들여온 것들은 양수리에 있는 아파트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고서를 모으러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고서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모았다는 그는 앞으로는 고서점 순례기를 책으로 내볼 생각이다. 이미 자료가 어느 정도 모아진 터라, 사진과 디테일한 자료 수집을 위해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니면 충분할 것 같다고 한다.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해야죠. 물론 본업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카사노바의 말처럼, 전 존경받기를 원하지 않지만 내 역할은 제대로 하기를 원하거든요.”
그는 인터뷰가 끝난 후 회사에 들어가봐야 한다며 서둘러 떠났다. 본업과 부업에 모두 충실한 사람, 카사노바만큼이나 다재다능한 남자, 인간의 매력에 빠져들 줄 아는 로맨티스트인 그가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고 나올지 무척 기대된다.

에디터·윤은정 / 사진·공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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