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9. 신념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

⑨ 신념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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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세느 강변, 노틀담 사원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고서의 매력에 빠져 떠날 줄 모르는 장소다. 50여년의 세월을 고서와 함께 지내온 이곳 주인 휘트먼씨. 그는 특별한 손님이 오면 세계의 대문호들과 찍은 사진을 진열해 놓은 방으로 손님을 안내한다.

 

카사노바를 알기 위해 한국에서 왔다며 그에게 명함을 내밀자 내게도 이같은 ‘특별 배려’를 해줬다

 

“카사노바는 재미있는 인물이지요.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를 반박하는 저서를 남길 만큼 자신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백발의 그는 카사노바에 대해 자못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앞에 나는 책을 한 권 꺼내 놓았다. 카사노바가 1779년 쓴 볼테르 비평서의 영인본. 카사노바가 말년을 보냈던 체코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에서 내가 구입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 카사노바는 볼테르의 철학과 사상, 특히 종교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볼테르는 18세기 계몽주의를 주도했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 그런 볼테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카사노바가 바로 우리가 알아왔던 희대의 바람둥이와 동일인이란 말인가? 우리는 법학박사이자 이탈리아 계몽주의 사상가로서의 카사노바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8세기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롯해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문을 두드린다”는 볼테르의 외침에 심취했다.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볼테르를 만나는 것은 철학자로 혹은 계몽주의자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카사노바도 1760년 스위스에서 볼테르를 만났다. 그러나 볼테르와의 만남에 대한 카사노바의 기억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평소 루소마저도 사생아, 배반자 유다, 사기꾼 등으로 폄하해 마지않던 볼테르였으니 카사노바를 홀대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그들이 처음 만나 나눈 대화를 보면 카사노바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카사노바〓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군요. 20여년간 저는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볼테르〓 앞으로 20년간 제게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가서 수업료 내시는 것을 약속해 주십시오.

 

카사노바〓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 드리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겉으로는 매우 우아했으나 속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왜 볼테르가 그렇게 신랄하게 말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카사노바는 볼테르를 공격하는 글을 썼다. 카사노바는 “볼테르가 본명(프랑소아 마리 아루에) 대신 필명인 ‘드 볼테르’를 사용함으로써 은근히 그가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드’란 말은 귀족의 이름 앞에 붙는 단어다.

 

카사노바에겐 일관성있는 철학적 신념이 있었는데 자유 의지가 그것이다. 카사노바의 생애를 점철한 끊임없는 애정 행각도 바로 이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방탕과 육체적 쾌락으로 물든 그의 삶을 보고 종교인 카사노바의 모습이 가당찮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도 한 때는 카톨릭 사제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크리스천으로 자처할만큼 강한 신앙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카사노바의 자유 의지에 대한 신념 속에 신과 종교가 들어있던 것이다.

 

카사노바는 문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삶과 이성이 종교적 영향 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종교관은 당시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자서전 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심할 때 자유를 상실한다. 운명의 힘에 의존한다면 신께서 인간에게 이성과 함께 부여한 자유마저 상실하게 된다.”

 

어떠한 삶의 원칙에 매달리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살고자 했던 카사노바는, 그로 인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의 일관된 주제는 자유였다.

 

카사노바의 삶과 철학을 프랑스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짓기는 어려우나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은 늘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명된다. 프랑스 혁명이 사회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자유 평등의 혁명이란 점에서 카사노바의 철학과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자서전 기록 중에는 프랑스혁명을 예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허기로 고통받아온 것처럼 나도 굶주림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시골의 한 농가에 숨어 들어 약 50마리의 훈제 청어를 훔쳐와 단 며칠 만에 먹어 치울만큼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나는 베네치아의 철옹성 같은 감옥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지낼 무렵, 귀족들의 낭비벽과 어리석음을 꼬집으며 경제파탄이 오고 끝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카사노바는 평등을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절실히 갈망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여인들과의 사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의 사랑은 늘 자유를 꿈꾸고 금기를 넘어서지 않았던가. 그의 사랑은 늘 평등했다.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여인들을 동등하게 대했고 늘 존중했으며 누구와도 차별없는 사랑에 빠졌다. 이런 그의 태도는 여인들에게 늘 호감을 사는 중요한 태도였다.

 

시대의 아웃사이더로서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꿈꾸던 카사노바는 프랑스 혁명의 열매를 채 누리기도 전에 죽었다.

 

카사노바가 남긴 이런 글이 떠오른다.

 

‘내가 가진 커다란 재산은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부당함에 굴하지 않는 내 자신의 주인이라는 점이요….’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jimkim@antiqu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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