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2. 위대한 기록자

"장르 넘나드는 창작열…저술만 40여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사노바가 집필에 몰두했던

체코 보헤미아의 독스 성.

 

 

② 위대한 기록자 카사노바

 

고서(古書) 수집을 하는 나는 어느 날 낯익은 이름의 빛 바랜 책을 발견했다. 1922년 런던에서 한정 출판된 카사노바의 자서전이었다. 방대한 양의 이 자서전은 무척 흥미로웠다. 한 인간이 이토록 다양한 색채를 띠고 살았음에도 단지 호색가라는 이미지만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놀라움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나는 지난 3월 카사노바의 삶의 흔적을 좇아 체코 프라하의 둑스 성(城)를 찾았다.

 

사랑과 열정의 화신이었던 카사노바가 후원자를 잃고 힘도 없이 방황할 때, 그는 이 성의 주인인 발트슈타인 백작을 만났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카사노바에게 둑스 성에서 책을 관리하는 사서로 일할 것을 권유했다. 카사노바는 1785년부터 1798년 타계할 때까지 이 곳에서 약 13년 동안 사서 일을 하는 한편, 하루 13시간씩 글을 썼다.

 

둑스 성은 프라하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한적한 분위기의 이 성은 5월부터 시작되는 전시회 준비를 위해 방문객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안내인은 먼 이국으로부터 온 동양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필자는 특별 안내를 받으며 온몸을 감싸 도는 전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바로크 풍의 그림과 조각들로 잘 정돈된 둑스 성에는 카사노바 기념관이 마련돼 있었다. 이 기념관에는 광기 어린 천재의 기행흔적이나 호색한의 추함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질풍노도와 같이 번져나가던 계몽주의의 중심에서 격변의 세기를 고뇌하며 살다 간 기록자로서 카사노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벽면 가득 고서가 꽃혀 있는 서재에서 안내인이 책장을 밀자 카사노바가 사용하던 방이 나타났다. 카사노바는 이 곳에서 200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한 밀랍인형이었다.

 

다른 방엔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온 유럽을 다니며 교제했던 인물들의 초상화로 가득했다. 특히 초상화의 주인공은 서양사에서 한 획을 긋고 간 왕이나 사상가 예술가 혹은 치마폭에 권력을 휘어잡은 여인들이었다. 카사노바가 이토록 대단한 인물들과 교제하고 지냈다는 것은 단지 그의 개성 때문만이 아니라 지성을 겸비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해박한 지식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빛났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각 방면의 책을 쓰고 출판한 지식인이었다.

 

카사노바가 진솔한 삶의 고백을 담은 책으로는 ‘나의 인생 이야기’가 있다. 65세때인 1790년 집필을 시작해 1792년 초고를 완성하고 세상을 떠나던 해인 1798년 조카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너무나 솔직한 삶의 기록이었다. 첫머리에 ‘자유인으로서 나의 의지로 살아 왔다’는 유명한 고백이 들어 있다.

 

여인들과의 사랑의 묘사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당시 출판되지 못했던 이 책은 18세기 유럽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사회 풍속 연구하는데 이만한 자료가 없다고 한다. 1822년 독일에서 처음 일부만 출판됐다가 140년이 지난 1960년에 와서야 무삭제 원본이 출판됐다.

 

여기엔 그의 출생배경과 성장과정, 삶의 철학, 정치적 활동, 다양한 사업경력, 문화 예술활동, 유럽전역을 떠돌며 나누었던 사랑 등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카사노바가 둑스 성에서 쓴 ‘제이코사메론(Jcosameron·1788)’은 놀랍게도 세계 최초의 공상과학 소설이다. 둑스 성의 카사노바 서재에는 이 책의 원본 표지와 친필원고가 귀중하게 보존 전시되어 있다.

 

이 소설은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폭풍에 난파되어 침몰한 후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문명국가로 빨려들어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카사노바는 이 작품에서 사회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비평, 풍자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가상의 문명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는 이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해 자신의 재정난을 덜어줄 것을 간절히 원했으나 후원자를 구하기 어려워 350부 정도만 출판했다. 작품의 성공으로 불멸의 작가로 기억되기 원했던 그는 빚만 떠 안고 낙담하게 된다.

 

카사노바의 명민한 두뇌는 여러 수학연구서와 의학 책을 쓴 것으로도 증명된다. ‘입방체의 수학적 문제(Solution du problem deliague·1790)’는 ‘제이코사메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쓴 수학 책. 그는 볼로냐에서는 의학에 관한 소책자를 내기도 했다.

 

또 풍자집 ‘염소의 양털(Lana Caprina·1772)’이라는 작품은 남성이 여성의 자궁에 의해 통제되는지의 여부를 놓고 두 명의 대학교수가 벌인 논쟁을 풍자한 글.

 

카사노바는 창작서, 학문서 뿐 아니라 방대한 독서량으로 고전어를 섭렵해 번역서도 많이 남긴 번역가였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이탈리아 사람들이 모국어로 읽게 된 것이 카사노바 덕택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베네치아에서 카사노바 클럽의 회원인 한 출판업자를 만났을 때 그는 카사노바가 일리아드를 최초로 이탈리아어 옥타브운율로 번역했다는 걸 너무도 진지하게 설명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문화예술 종합 잡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많은 철학자 예술가 정치인,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들과의 서신도 그가 죽은 후 그의 연구가들에 의해 편집 출판됐다.

 

200년 전 누군가가 40편이 넘는 기록물을 남기고 죽었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두고 대단히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카사노바는 본능적 자유를 좇은 그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방탕한 자로만 평가되고 있다.

 

그가 무엇을 해놓고 죽었는지 어떤 멋을 지닌 남자인지는 알려지지도 않은 채 성과 쾌락의 탐닉자로서 부끄러운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으니….기록물을 모으고 연구하는 필자가 수집한 그의 많은 저서의 복사본 속에서 카사노바의 억울한 하소연이 들려 오는 듯하다.

 

김준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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