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5. 탁월한 벤처사업가

⑤ 탁원한 벤처사업가

 

《밤기차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카사노바가 생존했을 당시인 18세기의 파리는 계몽주의 사상과 로코코의 화려함으로 그를 반겼을 것이다. 반면에 오늘날 파리의 새벽은 안개 속에서 카페오레를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파리 리용역에 내리니 거리 한편에 ‘로또(LOTO)’라고 쓰여진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온다. ‘로또’란 복권을 말한다. 문득 카사노바가 떠오른다. 파리에 처음으로 복권사업을 도입한 인물이 카사노바였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특히 경제의 맥을 잘 짚어냈다. 지금으로 치면 벤처사업가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의 복권 추첨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가브리엘 벨라의 그림(1782년작)

 

1756년 파리로 온 카사노바는 베니스에서 사귀었던 프랑스 외교관 베르니스 공사 덕분에 파리의 사교계에 자연스럽게 데뷔했다.

 

베니스의 감옥을 탈출했던 무용담과 해박한 지식으로 파리 귀부인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명성을 얻은 카사노바는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에게도 인정을 받게 된다. 어느날 오후 사저(私邸)를 나서던 퐁파두르 부인과 마주친 카사노바는 인사만 나눈 뒤 빨리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 해박한 지식에 귀부인들 호감

 

그러나 그녀는 매우 반가운 기색으로 카사노바에게 말을 건네왔다

 

“나는 당신이 프랑스에 정착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살려면 후견인이 필요합니다. 별 재능도 없는 저에게 누가 후견인이 되어주려고 하겠습니까.”

 

“천만에 말씀, 당신은 좋은 친구도 많고 나 또한 기꺼이 당신의 후견인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이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떠난 뒤 카사노바는 무언가 큰 자신을 얻은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권력의 핵심에 있던 그녀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했으며 이를 확인한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파리 사교계에 호감을 얻은 카사노바는 32세이던 1757년 재정난을 겪고 있던 파리시의 애로점을 파악하고 루이 15세에게 복권 제도를 건의했다.

 

# 첫 사업서 200만프랑 매출

 

그 제안은 곧 받아들여졌고 카사노바는 복권사업을 관장하는 책임자로 임명됐다. 카사노바는 탁월한 수학 지식을 바탕으로 첫번째 사업에서 200만프랑의 매출을 올려 파리시에 60만프랑의 수익을 남겨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복권 사업소 다섯 곳을 운영하다가 처분하여 1만프랑의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이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1758년 프랑스 외무부 특사 자격으로 네덜란드에 파견되어 프랑스 채권 판매협상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왔다.

 

아마도 이 시절이 상류사회를 동경하며 늘 부와 권력의 주변을 맴돌던 카사노바의 삶에 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사노바는 ‘로코코의 남자’라고 정의될 만큼 화려하고 멋을 아는 남자였다. 그가 늘 관심을 둔 패션은 그에게 새 사업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 화력한 옷 인기끌자 염직물 사업

 

1759년 카사노바는 복권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염직물 사업에 투자했다. 18세기의 사회혁명이 계몽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면, 경제혁명은 방직산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또한 로코코 문화의 영향으로 휘황찬란한 무늬의 옷감으로 만든 화려한 옷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옷의 가격이 너무 비싸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인도산(産) 사라사 옷감 같은 값싼 옷감을 애용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의 방직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사라사 옷감의 사용을 여러 차례 금지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카사노바는 이런 옷감 수요를 알고 염직물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패션의 역사는 카사노바를 이 시기 염직 공장을 크게 한 사업가로 기록하고 있다.

 

카사노바의 사업은 공장의 설비를 훔쳐 달아난 한 종업원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카사노바의 사업 파트너와 후원자들은 카사노바를 의심해 고발했다. 결국 사업 실패로 그는 짧은 기간이나마 상류사회의 꿈을 실현시켜준 파리를 떠나야 했다.

 

카사노바는 50세때 오랜 도피생활을 끝내고 베네치아로 돌아와서 출판업에 열중했다. 독서량이 방대하고 각 분야의 기초 학문을 줄줄이 꿰고 있던 그가 출판업에 열의를 갖고 뛰어든 것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정부 체제만 비방하지 않으면 모든 분야에서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므로 유럽 각국의 많은 이방인들은 책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출판업은 활기를 띠었다.

 

이처럼 좋은 조건이었지만 불운하게도 그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출판물 가운데 연극배우들과 함께 흥행 촉진을 위해 발행한 연극비평 주간잡지(Le Messager de Thalie·1780년 1월∼1781년 11월)는 훗날 예술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 비상한 수완 불구 불운 겹쳐

 

고서수집 취미를 갖고 있는 나는 카사노바가 발간한 연극비평 주간지 원본을 한권만이라도 손에 넣기 위해 많은 고서적상을 만났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주간지들은 도서관의 고서보관소에 있을 뿐이었다.

 

21세기 벤처사업가들을 이끄는 힘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성이다. 200여년전 벤처사업가로서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던 카사노바도 평생 자유로운 생각, 속박받지 않은 삶을 갈망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김준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jimkim@antiqu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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