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펌] 유디트 Jud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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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


유디트(Judith)는 신바빌로니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막사에서 그와 동침한 후 그의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하려 한다.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얼핏 보아서는 도저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하지 않다. 몸매는 너무 가녀리고 얼굴은 어찌 보면 앳되기까지 하다.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있기는 하나, 대체로 선혈을 뿌리며 베어져 나가는 사람의 목을 두눈으로 똑바로 지켜보기까지 할 만큼 대담해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약간 비현실적이긴 하다.

 

 유디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카라바조의 시대에는 유디트 이야기에서 성경적인 모티브 이외에는 별달리 가져올 것은 없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카라바조가 아닌 이상 그의 생각을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유대인들에게는 구국의 성녀로 간주되는 유디트를 좀더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다.

 

만약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사랑했다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랑의 방식, 혹은 그 유형은 유디트의 시대보다는 오늘날이 좀더 다양할 수 있다.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어떤 '관능적인' 형태로 사랑했다면 유대의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심각하겠지만, 유디트 스스로는 매우 심각한 자기분열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살인은 홀로페르네스를 사랑하는 자신에 대한 살인, 혹은 자기 내부에서 솟아나기는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는 관능적 욕망에 대한 살인이지는 않았을까?

 

관능적 욕망이라는 보편적 여성성의 일부분, 그리고 자아를 에워싼 관념... 그 둘의 대립과 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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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틸레스키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1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가 이 그림을 그릴 시점에는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은 없었다. 1620년, 즉 17세기였으니까. 그런데 어떤가? 여기에 나오는 유디트를 보면 바로 페미니스트적 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살기 위해 저항하는 홀로페르네스의 억센 오른팔을 가볍게 제압하고 굳세고도 단호한 표정으로 목을 베고 있다. 젠틸레스키는 이 주제에 대해서 유사한 표현으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나오는 유디트는 젠틸레스키 자신의 모습, 혹은 욕구를 나타낸 것으로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미술 수업을 받을 무렵 동료 남자 학생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겼으며 그 후로 길고도 지리한 재판을 거쳤다. 그런데 재판의 결과로 오히려 그녀가 고문을 당하여 고소를 취하게 되었고 강간한 남자는 무죄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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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 - <유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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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 <유디트>

 

젠틸레스키 이전에 카라바조가 있었으니 카라바조 이전 시기의 유디트의 모습은 어땠을까?

 

보티첼리가 그린 유디트에는 목을 베는 장면이 아니라 이미 목을 베어서 하녀가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보오람찬~ 하루 일을~" )

 

티치아노의 유디트는 전형적인 종교화의 성녀의 모습을 띠고 있다.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면, 대조적으로 카라바조가 왜 그 당시에 그토록 험하게 살다가 험하게 죽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티치아노가 살다 죽은 시대는 르네상스의  끝자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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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유디트>

 

femme fatal - 요부의 이미지...

 

클림트의 유디트는 티치아노의 그것과는 180도 다르다. 아니 179도 정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다른 설명은 모두 그림에 들어 있으니 그림을 보기만하면 알 수 있지만, 클림트의 그림은 유디트를 femme fatal, 즉 요부의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 아놀드 하우저

 

클림트 역시, 16세기의 카라바조처럼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역사적인 여러 이유로 해서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원시 농경시대적 사고방식과 최첨단의 현대적 사상이 어설픈 형태로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19세기가 바로 현대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클림트는 현대적인 작가이며, 클림트의 그림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현대적 여성성의 일부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 또한 예술가의 자화상이기도 한 측면을 하우저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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