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4일 금요일

카사노바 다시보기 - 7. 유행을 선도한 베스트드레서

⑦ 베스트드레서

 

해마다 2월 말이면 베네치아는 축제의 도시로 변하고 술과 춤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축제인 ‘마디 그라스’가 열리기 때문이다.

 

화려한 바우토(마스크)와 카발로(망토)를 쓴 관광객들이 산 마르코 광장으로 몰려들면 축제는 시작된다. 축제 물결 속에 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하게 등장하는 이가 있으니 그가 카사노바(실제로는 카사노바 역할을 하는 배우)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로코코 의상의 극치인 카사노바의 패션을 흉내낸 의상을 입고 그의 뒤를 따른다. 카사노바는 옷을 잘 입는 멋쟁이로도 유명했다. 오늘날 베네치아의 축제에서도 그가 입었던 패션을 그대로 흉내낼 정도니까. 카사노바의 회고록을 유행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카사노바가 시대의 멋쟁이로서 당시(18세기)의 유행을 선도하는 화려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카사노바에게 패션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성적인 신호를 보내는 삶의 중요한 요소였다. 독특하고 화려한 의상과 가발 마스크 손수건 모자 그리고 마차까지 카사노바는 패션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복장은 그 사람의 신분과 재력을 말해 준다. 복장을 연출하는데 귀재였던 카사노바는 백작이 되기 원하면 백작옷을 입고 공작이 되길 원하면 공작옷을 입었다.

 

그의 화려한 패션은 말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체코 둑스성에서 초라하게 은둔하던 말년 시절, 카사노바는 주변의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하얀 깃털을 꼽고 금사로 수놓은 양복과 값비싼 빌로드 조끼를 입고 다녔다. 또 정장 차림으로 무도회에 나가 장중한 스텝을 밟았다. 늙고 가난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가꾸는 데 열정을 불태웠던 카사노바. 체코의 둑스성에서 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카사노바의 섬세한 자기 사랑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표현으로서 옷을 중시했던 카사노바는 돈이 생기면 멋진 의상을 먼저 마련했던 남자였다. 카사노바는 자신만의 개성을 연출하기 위해 스스로 디자인한 의상을 입기도 했다. 조각천을 연결하여 화려하고 재미있는 의상을 만들어 입고 로마의 축제에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 많은 상류층 여인들에게 호감을 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도 그의 외모를 칭찬한 바 있다.

 

바로크의 무겁고 장중한 형식이 가볍고 장식적인 것으로 변한 로코코풍의 의상은 인간의 자유와 감성을 중시한 패션이다.

 

여자의 옷은 목과 가슴을 노출하여 더욱 관능미를 과시했고 남자는 넙적 다리의 곡선을 드러내서 육감적 남성미를 과시했다. 카사노바는 늘 이런 유행을 선도하는 의상을 입고 다녔다.

 

당시 패션의 일종이었던 마차. 여기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카사노바가 어느 상인과 그의 딸을 자신의 마차에 태워주었을 때 그 딸이 속옷을 입은 광경을 그는 개탄의 눈길로 바라본 적이 있다(18세기 사교계 미녀들은 때로 속옷을 입지 않았다!).

 

카사노바가 유럽의 전역을 여행하면서 이용한 마차는 운송수단이면서도 귀족의 호화로운 사치품이었고 그의 사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구였다. 그의 회고록에는 마차 안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어 마차 앞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질 때 합승한 농부의 아내가 경련을 일으키며 카사노바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벼락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해 그녀의 옷을 들추고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마차의 흔들림이 그 일을 도와 주었다.

 

자신의 남편이 바로 뒤에 따라오는 마차에 타고 있음에도 그녀의 입가에 어느새 만족의 미소가 흐르는 걸 보고 카사노바가 여유있게 말했다.

 

“벼락과 천둥에 대한 여인의 공포를 치유할만한 건 이 것 밖에 없소. 나는 그걸 알고 있오.”

 

18세기, 거의 매일 열리는 가장무도회와 연중 행사인 대형축제, 그리고 이런저런 음주모임은 유럽 전역을 사치풍조에 빠져들게 했다.

 

당시 귀족들은 벨벳 공단, 금은 장식, 리본, 견직 모자, 깃털 장식, 가면, 손수건, 우아한 레이스에 날이 갈수록 사치를 부렸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돈을 모아 어느 정도 부자가 되면 이런 귀족들의 흉내를 내려고 안달이었다.

 

특히 귀족들이 즐겨쓴 마스크는 카니발이나 공공축제때 군중 속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마스크를 쓰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아 진다. 신분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한다. 도박으로 돈을 탕진한 귀족들이 마스크를 쓰고 산 마르코 광장에서 구걸을 하기도 했다.

 

카사노바도 여인을 유혹하는데 마스크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18세기 사람들이 유행에 따라 계속 옷차림을 유지하려면 경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재산가도 휘청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랑과 관능, 쾌락을 위해 기꺼이 패션에 많은 돈을 지불했다. 옷을 잘 입어야 여자를 유혹하고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랑은 하나의 광기였다. 카사노바도 자신의 글에서 사랑은 광기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사치로 인해 사람들은 결국 추락하고 파멸하게 된다.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카사노바 역시 많은 돈을 그렇게 썼고 끝내는 추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패션을 통해 개성과 자유를 추구했던 카사노바. 거기에 특유의 열정이 더해짐으로써 카사노바는 유행의 선구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대표)jimkim@antiquus.co.kr

 

# 앙드레 김이 본 카사노바 패션

 

카사노바의 패션에서 우리는 그가 풍미하며 살았던 18세기 유럽 복식문화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평생 감각의 자유를 추구하였던 카사노바답게 그의 옷에 나타난 색상, 디자인, 액세서리 이 모든 것에는 탁월한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감성이 넘쳐 흐르고 있으며 미래지향적인 그의 의식세계를 느낄수 있다.

 

특히 조각 천을 모자이크한 그의 패션 감각은 지금의 디자이너들도 파격적 감각으로만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였고 절묘한 색의 조화와 디자인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18세기 로코코의 화려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심미안을 갖고 연출한 그의 옷에서 우리는 시대의 로맨티스트로서 문화를 선도했던 그의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패션감각은 각자의 개성과 감성이 자유로이 표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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